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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 낮. KU Leuven의 열람실인 아고라에 앉아 있다. 시험 기간이라 자리가 별로 없는데 운이 좋게 딱 하나 빈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 앉아 있는 기분은 언제나 좋다. 여기 학생들은 자소서를 쓰거나 토익, 인적성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전공 시험 공부를 한다. 이것만이 공부다운 공부, 라고 말하면 너무 엘리티스트스러우려나. 한국에 돌아가면 나야말로 '취업준비'에 매진해야 하는 입장인 주제에. 제 입에 밥술 떠 넣으려는 숭고한 노력을 깔아뭉개는 일은 절대로 고상하지 않다. 오히려, 철없는 소리다.김어준의 말마따나, 처음 여행을 다닐 때는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다니면 다닐수록 많은 것들이 만국공통임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이 열람실. 시험기간에는 열람실이 여는 새벽 여섯시에 줄을 서서 입장한 뒤에 자리를 맡아놓고 돌아가서 다시 자다 오는 학생들이 있단다. 흔한 한국 대학가의 시험기간 풍경이다. 책을 펴놓고 한참동안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옆자리 친구와 속닥속닥거리기도 하고. 똑같다, 사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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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는 길이 아니라 멀리 가는 길을.' 영유언니의 카카오톡 대화명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남들에 비해 무척 빠른 편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제는 멀리 가야 할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저당잡히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보지 않는 것도 안 될 일이다.
내 눈이 좁았다. 나는 멀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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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다 보니까 자꾸만 잘 써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엄청나게 시달려왔는데, 그러다보니까 어느 순간 글이 써지지 않는 일을 자주 겪는다. 지금은 에라 모르겠다, 내가 뭐 위대한 글쟁이라고. 그냥 적고 싶은대로 적으련다.
글쓰기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는 것은 사실 기준이 높아서다. 내가 남들의 글을 판단하는 만큼 남들도 내 글을 판단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평가하고 평가당한다. 내가 하지 말자고 마음먹어서 될 건 아니다. 그냥, 어쩔 수 없다.
여행을 하면 이야기가 생긴다. 그래서 뭔가 쓰고 싶어진다. 전처럼 체계적으로 여행기를 엮거나 하려는 의지는 사라져버렸다. 미국일기도 엮고 싶었고 중국여행기도 정리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유럽에서의 이야기를 이렇게 나름대로 적어보지만 사실 이게 끝일 것을 알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서 뭔가 더 정리하고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미 '여행작가'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글을 자꾸 쓰다보면 자기 자신을 고백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솔직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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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잘 왔다고 생각한다. 조급함을 버릴 수 있게 됐고 차분히 머리를 비울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조급한 취준생들의 한탄과 한숨 사이에서 짓눌려 있다가 대학원생들, 유학생들, 다양한 배경과 비전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니 공부, 그리고 인생에 대한 장기적 비전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사실 사람 사는 건 정말이지 어디나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래서 나의 삶이 있는 서울이 더이상 싫지만은 않아졌다.
한국문학 공부도, 번역 공부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connecting the dots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어도 놓을 필요가 없고, 영어는 더더욱 계속해서 필요할 것이다. 여정이 예상밖이고 놀라운 만큼이나 삶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므로 놀랄 준비를 하자!
한국이든 유럽이든 마찬가지다. 어디에 있든지간에 나를 지켜야 하고, 내 주변을 돌봐야 한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법. 유럽이라고 딱히 나을 것도, 한국이라고 끔찍하기만 하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스물넷. 다음주면 만 스물다섯이 되는 내 나이. 아직 괜찮은 나이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조급하지 않게 한번에 하나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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