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문학과지성사 문장 훔치기

만난 지 세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내가 술에 취했다는 걸, 혹은 어쩌면 그 취기가 술이 아니라 갈망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파한 니시무라는 내게 말했다.
"그게 진짜 자네가 바라는 것이라면 이 세상 전부가 자네를 도와줄 거야."
"어떻게? 이 세상 전부가 나를 도와줄 수 있다면, 과연 어떻게?"
내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갈래머리 소녀 시절부터 악마처럼 강해지고 싶다고 읊조리던 여자였으며, 창문을 활짝 열어 내 작은 방으로 뜨거운 태양을 끌어들인 여자였다. 그런 여자 앞에서 나는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37)

그날 각자 지녔던 의심들. 그러니까 조선인 통역과 조선어로 대화하면 동세영이 그 내용을 의심하고, 조선인 통역이 동세영과 중국어로 대화하면 내가 이를 의심하고, 나와 동세영이 일본어로 대화하면 조선인 통역이 이를 의심하던 일이 어쩌면 앞으로 내가 보게 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의 가장 큰 배경일지도 모르겠다. (176)

"중학 시절, 내가 존경한 사람은 톨스토이였소. 지하 학습반에서 다른 중학 학생들과 둘러앉아 공산주의를 학습할 때도 나는 마르크스보다도 톨스토이를 더 신봉했소. 붉은 5월 투쟁으로 미쳐 날뛸 때도, 감옥에서 나와 화룡에서 지하활동을 할 때도, 또 지주의 집을 습격해 날창뿐이었던 적위대를 무장시킬 때도 내 주머니에는 항상 톨스토이의 책이 있었소. 그의 주인공들은 끝없이 세계와 투쟁하면서도 인도주의와 희생을 믿었던 자들이오. 그건 그가 자연을 사랑했다는 사실과도 결부되는 것이오. 나무는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서는 세계와 끊임없이 투쟁하니까 저렇게 곧추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오. 인간 역시 모순에 가득 찬 세계 속에서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오. 도덕이란 그렇게 변화하는 인간만이 알 수 있는 것이오. 일단 그렇게 변화하는 인간의 도덕을 알게 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잔혹한 일들을 혐오하게 될 수밖에 없소. 변화를 멈춘 죽은 자들만이 변화하는 인간을 잔혹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건 정말 구역질이 나는 일이오. 하지만 인간은 그보다 힘이 더 센 존재요. 나는 잔인한 세계에 맞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잔인한 세계 속에서도 늘 변화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됐소. 인간이 성장하는 한, 세계도 조금씩 변하게 마련이오. 그런 인간의 힘을 나는 믿었소." (232-233)


- 에곤 실레의 벌거벗은 무용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한 책이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니. 제목 부근에 디자인된 별도, 표지의 붉은색도 모두 의도된 것이었으리라. 매카시즘이나 종북몰이도, 공산당의 숙청도, 결국은 다 똑같은 것. 인간에 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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