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문학동네 문장 훔치기

우리가 살면서 겪는 우연한 일들은 언제나 징후를 드러내는 오랜 기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실연의 고통에 잠겨서 죽지 않고 살아나기 위해서는 그렇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예기치 않게 쏟아진 함박눈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시작된 우리의 사랑은 또 그만큼이나 느닷없이 끝나버렸다. 그녀에게서 이별 통고를 받은 뒤 나는 우울함 심정으로 긴 시간을 두고 그 이유를 알아내려 애썼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보름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던 부엉이를 바라보던 내가 감격에 젖어 청혼한 일 때문이 아니라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랑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는데, 막상 별다른 이유 없이 헤어지고 나니 왜 지구는 자전 따위를 해서 밤이라는 걸 만들어내 나를 뜬눈으로 누워 있게 만드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239쪽, <달로 간 코미디언> 中)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있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들을 골라 나오다가 누가 보다 만 듯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던 걸 집어들어 함께 빌려다 읽었다. 김연수의 책은 두어 권 읽었지만 이번 책이 가장 좋았고 그건 상당 부분 마지막에 수록된 중편 <달로 간 코미디언>과 신형철의 해설에 기인한다. 올 겨울엔 열심히 부지런히 많은 책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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