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장강명 ★ 책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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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나의 점수 : ★★★★★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 속, 코마 화이트에 빠진 이십대


용산역 아이파크몰의 번잡스런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마지막 남은 백 쪽 가량을 단숨에 읽어버리고서 엉엉 울었다. 즐겁게 대화하고 커피와 망고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얼굴을 온통 찡그리며 멈추지 못하고 읽다가 마스카라가 번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엉엉 울었다.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많은 '강력추천'을 받은 책이고 그만큼 좋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정확한 작품이었다. 왜 사는가. 보탤 것 없이 새하얗게 표백된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우리 이십대는 무얼 하고 싶어 사는가. 유엔 사무총장이 꿈이에요. 유엔 사무총장 하면 뭐 하는데. 훌륭한 대법관이 되고 싶어요. 대법관 되면 뭐 하는데. 어차피 우리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이미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는 세상인데. 유엔 사무총장이다, 대법관이다, 그럴싸해 보이는 장래희망 따위도 결국은 그 하얗게 표백된 세상 속에 'TO'가 생겨야만 이루는 꿈이다. 그래서 그런 거창한 '장래희망'들 따위는 '7급 공무원'이라거나 '교사'라는 장래희망과 사실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출판이 2011년 3월로 돼있다. 아마 저자는 2010년 3월의 김예슬선언에서 조금 아이디어를 얻어 이 책을 쓰지 않았나 생각한다. 책에는 작가의 말이든 추천사든 어느 곳에도 김예슬이 언급돼 있지 않았으나 나는 그렇게 보았다.

김예슬선언은 선언이었고, 어른들이 균열 없이 완벽하게 쌓아둔 탑에 돌을 던지는 일이었다. 소설 속의 자살선언도 그렇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돌멩이가 아닌 목숨을 던졌다는 것이다. 자퇴가 아니라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예슬선언이 있었던 이후,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는지 그저 궁금해서 그랬던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무튼 김예슬선언 카페라는 것에 가입해 게시물들을 살펴본 일이 있었다. 돌멩이들은 열심히 연대하며, 견고하고 완벽해 보이기만 하는 그 학벌사회라는 상아탑에, 경쟁제일이라는 강철탑에, 빚쟁이 세대라는 자신들의 초라함에 열심히 몸을 내던져 작은 흠집이라도 내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 중 몇몇은 실제로 자퇴를 했을 것이다. 휴학하고 지방 집에 내려가 글 쓴답시고 찌질대고 있던 나도 조금 고민했을 정도니까. 베르테르 효과처럼, 자퇴를 했다가 한 학기 후, 일년 후 재입학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예슬선언에 대한 대다수 이십대의 반응은 기실, '냉소'에 가까웠다. 너야 고대 갈 정도로 공부 잘 했고 똑똑하니까 학벌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건가 보지. 유명해져서 좋겠다, 글빨도 좀 있던데, 그 '스펙'인지 '스토리'인지 가지고 어디 원서 쓸래? 운동권 마일리지 쌓니? 심지어는 너 대신 그 학교 입학하고 싶었던 사람 입장을 생각해봐라, 다른 경쟁자 제치고 고대 들어갔으면 열심히 끝까지 다녀주는 게 패배자에 대해서도 예의다... 라는 둥.

그 냉소적인 사람들을 마냥 비난할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의 말도 틀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그레이트 화이트 빅 월드에 무사히 편입되고자 부단히 스스로를 표백시켜온 그 냉소자들의 논리가 이 세상에는 더 들어맞는다. 일례로 '지잡대생'들의 자퇴는 신문에 나지도 않는다. 고대쯤 돼야 세상도 관심을 가져주고,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일필휘지의 선언문을 쓸 글솜씨는 있어야 자소서 붙고 '취뽀'도 하는 것이다. 가장 슬픈 것은 그 사건을 지켜보면서도 재수, 삼수 하면서 그놈의 고대 들어가겠다고 절치부심하는 수험생들이, 김예슬의 지지자보다 더 많지 않을까 하는 현실이다. 니가 포기한 그 고대 못 들어가서 안달인 다른 사람 입장은 생각 안 하냐, 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최근에 먹고 살아 보겠다고 학원강사 알바를 뛰게 되면서 더욱 몸으로(특히 소염 작용 하는 트로키제를 먹어 가며 간신히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목으로) 실감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서울시내 버스에 언제부터 그렇게 '인강' 광고가 많았던가?

<표백>에서, 자살선언 사이트인 와이두유리브닷컴은 묻는다. 왜 사는가? 이 완벽하게 하얗고 깨끗한 세상에 네가 더할 수 있는 색깔 따위는 아무것도 없는데 왜 사니? 차라리 죽자. 새빨간 핏방울이라도 거기 한 점 남겨보자. 아주 쉽게 트집잡고 반박할 수도, 혹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는 논리이다. 오늘날 이십대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욱 쉽게 입을 떼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라고 너무나 쉽고 촌스럽게 헤픈 선언조로 말해버리고 싶지는 않다. 디스이즈더리즌닷컴의 게시판을 채우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3년 안이라면 더 좋을 것이고, 그렇게 빨리가 아니라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삼십년이 지났는데 디스이즈더리즌닷컴을 개설조차 못했다 해도, 사실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그 시간 동안의 치열한 고민들이, 모두 그 이유로 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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