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여성문학전통] 억압을 승화하는 문학의 기능 : <자기만의 방>을 통해 본 여기저기 썼던 글들

억압을 승화하는 문학의 기능
: <자기만의 방>을 통해 본


1. 서론
버지니아 울프의 1929년 작 <자기만의 방>은 영미문학사에서 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정전(正典; canon)에 해당한다. 작가는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성의 지위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의식의 흐름에 의거해 서술한다. 서사보다는 작가의 내면 세계에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소설보다는 저자의 주장을 담은 팸플릿으로 분류하는 평자도 있다. 하지만 작품 구석구석에서 드러나는 뛰어난 묘사와 비유, 표현력, 문학성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 작품을 모더니즘 문학의 정수로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기만의 방>에 나타난 버지니아 울프의 양성성에 대한 통찰은 오늘날 여성학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주제이다. 작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양성성을 지니고 있으며, 다만 여성 안에는 여성성이 더 강하고 남성 안에는 남성성이 더 강하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실제로 생물학적 사실과도 합치하며-양성 모두 여성 호르몬과 남성 호르몬을 가지고 있으며 그 비율의 차이는 기실 몇 퍼센트 되지 않는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보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 우세하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는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2. 본론
1) 작가의 성 의식이 작품에 미치는 악영향
버지니아 울프는 인간의 양성성을 말하면서, 훌륭한 문학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 양성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한쪽에 치우친 성 의식에 갇히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셰익스피어를 가장 훌륭한 양성성을 발휘한 작가로 꼽으면서, 그와 같이 양성적인 마음을 가져야만 위대한 문학을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 의식과 편견에 억눌린 작품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지는데, 작가는 제인 오스틴과 샬럿 브론테를 비교하여 이를 설명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보기에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보다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더 훌륭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샬럿 브론테는 스스로가 여성으로서 억압당하고 있다는 의식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비난해도 좋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작품 속 제인 에어의 대사에 잘 드러나 있으며(* 하단 참조), 샬럿 브론테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작품을 많이 썼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제인 오스틴은 여성으로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기는 했지만 그에 울분을 토하기보다는 자기가 처한 여건 속에서 최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즉 양성성을 발휘하여 담담하게 작품을 썼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문학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버지니아 울프의 입장이다.

* “…… 누가 나를 비난하는가?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이지. 내가 불만스러워한다고들 말하겠지. 나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들떠 있음은 내 본성 안에 들어 있었고, 그것은 때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나를 동요시켰다. (중략) 인간은 평온함에 만족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인간은 행동을 해야 한다. (중략)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고요히 있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여자들도 남자들이 느끼는 대로 똑같이 느끼며, 남자 형제들만큼이나 여러 능력의 발휘와 노력의 장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엄격한 억제와 너무나 절대적인 침체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 <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 오진숙 옮김, 도서출판 솔)> 130~131쪽에서 재인용

2) 그렇다고 여성의 지위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나?
이러한 버지니아 울프의 주장을 읽고 있노라면, 순간 그녀를 공격하던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와 같은 마음이 내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고상한 문학을 창조하기 위해서 불의한 현실에 눈감아도 좋다는 말인가?”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성 의식을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맞도록 변용한다면 광범위한 ‘피해자 의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노사 갈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버지니아 울프 식으로 말한다면 노동자들이 사측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는 의식을 샬럿 브론테처럼 울부짖기보다는 제인 오스틴처럼 열린 마음으로 서술해야 훌륭한 문학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경림이나 박노해의 시가 위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찰스 디킨즈 식의 리얼리즘이나 찰리 채플린 식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제인 오스틴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특히 한국의 경우 일제 강점기와 독재 정권에 의한 탄압 등으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학 역시 그러한 현실을 기반으로 탄생해왔고, 자연히 피해자 의식이 투영된 작품들이 많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고 노래했던 이상화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렸던 이육사 등은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꼽힌다. 그런데 그들의 피해자 의식을 이유로 작품의 가치를 깎아내려도 좋은 것일까?

3) 억압을 승화하는 기제로서의 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문학의 기능을 크게 ‘모방’과 ‘정화’로 구분한다. 그 중 정화란 억눌린 감정을 문학으로써 승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문학의 기능을 고려한다면 현실에서 받는 억압을 문학적으로 승화한 이상화나 이육사의 작품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서정주의 경우 시대적 울분보다는 개인의 서정을 그려낸 시들을 썼다. 버지니아 울프 식으로 말하자면 서정주를 제인 오스틴에, 이상화나 이육사를 샬럿 브론테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정주의 시가 이상화나 이육사의 시보다 훌륭한가? 그것은 단정 짓기 어렵다.
다만 문학이 억압을 승화하는 기제로서 역할하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와 같은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의견에 분명히 동의할 수 있다. 샬럿 브론테가 <제인 에어>에서 제인 에어의 입을 빌어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주장을 내뱉는 모습은, 어쩌면 이러한 문학적 승화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이 거칠다고 지적한 것이라면,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각에 전혀 토를 달 생각이 없다. 샬럿 브론테가 여성의 지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억압받는 여성의 처지에 대해 쓴 것 자체를 나는 환영하는 바이지만, 그 표현이 다소 덜 정제된 측면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글쓴이의 내면세계와 글과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단 억압 뿐 아니라 어떤 감정을 맞닥뜨리든, 작가가 이를 충분히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뱉어버린다면 훌륭한 작가라고 할 수 없다. 작가란 글을 매개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인데, 자기 내면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서-이를 테면 성 의식에 억눌려서- 글을 쓴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글에 동의하거나 감동받기 어려워진다. 다른 사람으로서는 공감하기 어렵고 별 의미도 없는 사변적이고 지엽적인 이야기로 흐르기 때문이다. 격렬한 감정일수록 충분히 거르고 다듬고, 너무 뜨거우면 한 소끔 식혀서 표현할 줄 아는 것이 훌륭한 작가의 능력이다. 그런 글일수록 독자는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그것과 같이 활짝 열린 마음이라 할 것이다. <자기만의 방>에서는 이 활짝 열린 마음을 양성적인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이 양성성을 보다 넓게 해석하면 한쪽 입장에만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는 편견 없는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예로 든 노사 문제에 대해서 글을 쓸 경우에도 피해자 의식에 억눌리기보다는 이러한 편견 없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편견 없이 활짝 열린 마음은 비단 양성 간의 관계를 넘어서서 모든 억압-피억압 관계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하는 작가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이다.

3. 결론
‘잠수함 속 토끼’라는 비유가 있다. 잠수함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 잠수함 속에 토끼를 함께 태웠던 일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토끼는 공기 중 산소 포화도에 지극히 예민한 동물이어서, 잠수함 속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경우 곧바로 이상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인간이 산소 부족을 느낄 지경이 되어서 그 때 물 위로 올라오면 이미 늦기 때문에, 토끼의 반응을 살펴 수면 위로 되돌아올 시점을 알기 위해 토끼를 태웠던 것이다.
한 사회에서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나 지식인들을 잠수함 속 토끼에 빗대곤 한다. 작가는 인간 사회의 산소 부족, 즉 불의나 부조리 등의 사회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라는 시대의 불의에 항거해 펜을 들었듯이 오늘날에도 많은 작가들이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의 해방을 위해 문학을 무기로 싸우고 있다.
현실에서의 억압을 승화하여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기제로서의 문학은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언제나 유효하고 또한 필요하다. 이 지난하고 끝나지 않는 문학적 투쟁의 장에서, 성 의식이든 어떠한 종류의 피해 의식이든지간에 편견을 가지는 것은 작품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문학은 삶의 진실, 즉 실재를 담고 있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글이 결코 좋은 문학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정한 숙성과 재구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편견에도 짓눌리지 않는 열린 마음이 요구된다.


* 퀴즈 반 넘게 안 치고도 A+ 받았던 과목의 페이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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