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많았소 삼순씨, 이젠 아프지 마시유" OhmyNews

"고생 많았소 삼순씨, 이젠 아프지 마시유"
[내 엄마를 말하다③] 엄마가 미워 집 나온 지 7년... 천방지축 품밖의 딸
11.02.05 13:35 ㅣ최종 업데이트 11.02.05 13:35 박솔희 (jamila)
 

충청도 사람들이 그렇다. 선물을 주면 그저 고맙다 받지를 못하고 "뭐 이런 걸 샀냐"며 외려 타박이다. 눈길을 뻗치는 둥 마는 둥, 포장을 풀어볼 생각도 안 하고 먹던 밥만 계속 먹는다. 지난 1일도 그랬다. 아빠가 내민 고급 화장품 세트를 받고서 엄마는 "당신이 진짜 이걸 샀느냐"에서부터 "난 이런 거 안 쓴다", "환불해서 돈으로 달라"며 퉁명스레 굴었다. 안 쓰긴 뭘. 지금도 화장대 위에 있는, 평소 쓰는 거랑 똑같은 화장품인 거 내가 다 아는데. 

'멍청도'라고요? 순박한 겁니다

참 미련하다. 좋으면서 괜히 그런다. 주면 주는 대로 날름 받고 고마워 죽겠다며 호들갑을 떨어야 주는 사람도 기분 좋고 자꾸만 주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임을 모르지도 않을 거다. 그럼에도 우리 엄마가 계속 살갑잖게 툴툴 거리는 건 입에 발린 말로 뭘 얻어낼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남들은 그걸 처세라고, 똑똑한 거라고 부르며 입 속의 혀처럼 굴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멍청'하단다. 아무튼 충청도 사람인 우리 엄마도 그렇다. 충청도에서 식당에 가게 되면 서울에서 그러듯이 방긋 "어서오세요" 반기며 자리 안내에 물 세팅을 해줄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손님이 가게에 들어서도 들릴 듯 말듯 "앉으셔요" 한 마디 하고는 멀뚱멀뚱. 알아서 자리 찾아 앉은 손님이 불러봐도 대답 없고 쳐다 봐도 본체 만체.

그래도 때 되면 알아서 물수건 갖다 주고 반찬 갖다 주는 게 충청도 스타일. 답답하긴 해도 우직한 맛이 있다. 매끄럽게 겉포장하고 친절하게 구는 법은 몰라도 아무튼 사람들 맘씨만큼은 조미료 안 들어간 찌개마냥 정직하고 순박한 데가 내 고향 충청도다.

충청도가 고향인 우리 엄마, 충청북도 옥천 시골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줄줄이 딸년들만 나오는 상황에 역정이 나셨던지 이름도 성의 없이 '삼순'이라 붙여줬다. 셋째 딸이라 삼순. 예쁘게 감싸주려는 한 치의 노력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호칭. 그 꾸밈없는 이름처럼 우리 엄마는 아직까지 화장도 잘 안 하고 비싼 미용실 한 번 가는 법이 없다.

슈퍼맘 아닌 엄마가 미웠다... 그래서 난 집을 떠났다

세상 어떤 자식이 안 그랬겠느냐마는(아, 그런데 우리 엄마 말에 따르면 엄마 친구 딸들은 안 그런다고 하기는 하더라) 나도 어지간히 엄마 속을 썩이며 자랐다. 유난히 허약해 보약과 걱정을 달고 자랐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자연히 학교 가는 걸 싫어했고 담임 선생님과 마찰도 잦았다. 초등학교 때는 그렇다 쳐도 정신 좀 차려야 할 고3 때까지도 그리 철없는 행동을 해대서, 엄마는 아직도 그때의 내 담임 선생님(운명의 장난일까, 그는 나중에 내 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만나기를 껄끄러워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콘서트장에서 부모님
ⓒ 박솔희

엄마와 공무원인 아빠는 맞벌이를 했고, 엄마의 퇴근은 아빠보다 늦는 적도 많았다. 자연히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알아서 밥도 잘 챙겨먹고 문단속도 잘 했지만, 사랑을 별로 못 받고 자랐다. 지금에 와서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그때도 많이 사랑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그걸 아는 것과 그 당시 사랑을 느낀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린 나는 엄마가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늘 피곤해 했고, 한 번도 내가 바라는 완벽한 엄마인 적이 없었다.

우리 엄마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완벽하고 인자하고 예쁘기까지 한 그런 '슈퍼맘'이 아니라는 게 싫었다. 생일날, 딸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돈가스 전문점에서 파티를 열어 주는 그런 친구의 엄마가 부러웠다. 내가 놀러 가면 간식을 챙겨 주시던 친구의 엄마가 참 신기하고 부러웠다. 나는 긴 머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엄마가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는 것조차 마음에 안 들었다. 엄마가 미웠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었다.

엄마를 보기만 하면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던 사춘기 시절, 마침 탈출구를 발견했다. 지역의 유명한 기숙사 학교에 입학할 기회를 얻은 것. 나는 주저 없이 집을 떠났다. 동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대입 때 농어촌특별전형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 우리 가족은 아빠가 한 시간씩 출퇴근하는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굳이 이 지역에 살고 있었다) 난 과감히 그걸 버렸다.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떠났다.

집 떠난 지 7년째... 천방지축 품 밖의 자식

 

  
부산 태종대 절벽 위에서. 난 도무지 집에 붙어 있지를 않고 틈만 나면 혼자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 박솔희

그렇게 집을 나와 따로 살게 된 것이 올해로 벌써 7년째가 된다. 생각해 보면 참 천방지축이었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날아갈 듯 신이 났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보고 싶다며 밤마다 전화기를 붙들고 징징거렸다. 나는 그런 애들을 비웃으며 새로 획득한 자유를 충실히 만끽했다. 자습이 끝나고 기숙사에 올라가면 다들 부모님과 통화하기 바빴다. 나는 용돈이 떨어졌을 때 돈 부쳐달라고 문자를 보내는 것 외에 별로 연락을 안 했다.

대학에 와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는데, 친구들은 주말마다 뻔질나게 드나드는 본가에 나는 한 학기에 두어 번 갈까 말까 했다. 서울에서 KTX로는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음에도 그랬다. 그 대신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여기 저기 서울의 재미있는 곳들을 쏘다니기 바빴다.

그래도 자식이란 존재가 참 이기적인 거라서, 삶이 힘겨울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언제나 집이고 엄마였다. 좋은 말 한마디 보태주는 것도 없으면서 힘들 때 투정을 쏟아내는 대상은 언제나 엄마였다. 작년 이맘쯤 겨울, 2학년을 마친 뒤 바쁘고 정신없는 서울 생활에 쉼표가 필요해진 나는 자취방을 정리하고 본가로 내려왔다. 휴학을 하고 아홉 달 정도 집에서 지냈는데, 물론 중간에 뻔질나게 서울 및 방방곡곡을 드나들긴 했지만 열여섯 이후 이토록 오래 엄마와 같이 지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동안에 운이 좋아 엄마 회사에서 보내주는 포상 해외여행도 한 차례 따라 갔다 왔다. 내 앞에선 잔소리, 걱정, 타박만 하던 엄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과장을 200% 보태 내가 어디에 기사를 쓴다는 둥, 영어를 잘한다는 둥 은근 슬쩍 자랑을 해댔다. 동네 아줌마들을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디서 상을 타거나 좋은 일이 생겨 소식을 전하면 들은 체 만 체 하면서도 죄 기억하고 있다가 남들 앞에선 호들갑스런 팔불출로 변신해 떠벌리곤 했다.

미련한 삼순씨, 딸내미 시집살이 하느라 고생했소

  
엄마와 어릴 적 고향 대천의 해변에서
ⓒ 박솔희

엄마는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을 많이 한다. 엄마 자신이 글을 써봤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상장이 키 높이로 쌓일 만큼 백일장을 휩쓸었던 엄마는 대학도 국문과를 갔다. 그런데 시골 백일장에서 아무리 상을 많이 탔어도, 도시에서 자라 보고 들은 것 많고 책도 많이 읽은 애들을 이길 수가 없었단다. 글쓰기가 너무 힘들었단다.

그래서 엄마는 부러 내게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했다. 괜히 기교만 배울까 걱정한 것도 있고, 내가 아예 글쓰기 같은 것 모르고 살길 바란 마음도 있었다. 난 엄마를 닮아 몸도 약하고 심지도 굳질 못했다. 엄마는 내가 그저 편하게, 쉬운 것만 하고 살길 바랐다.

그럼에도 이렇게 꾸준히 <오마이뉴스> 등의 매체에 글을 쓰고 있고 몇 달 뒤면 내 이름으로 된 책도 나올 예정이니 엄마의 바람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사실 난 단 한 번도 엄마가 바라는 대로 큰 적이 없다!). 그래도, 비록 어쭙잖지만 약간의 글솜씨가 있는 것은 분명 엄마를 닮아서 그런 것 같다.

못된 딸년 시집살이 하느라고 좋은 날 다 보낸 우리 엄마. 자식이 생기면 나도 저렇게 될까? 엄마는 건강도 좋지 않은데 무리해서 일하고 나랑 싸우며 스트레스 받느라 작은 수술도 여러 차례 했다. 내가 아무리 일을 그만두라고 말해도, 그러겠다고 말만 벌써 십 년째다. 엄마는 서울에서 지하철도 제대로 못 타는 미련한 충청도 사람이라서, 그냥 그게 사는 건 줄 알고 그렇게 사는 것 같다.

이젠 엄마가 당신의 인생을 즐기며 살았으면 한다. 좋아하는 책도 마음껏 읽고 문화생활도 좀 즐기고 축난 건강도 추스르고(이런 말 하면 또 "네년이 빨리 취직을 하든가!"라고 하겠지. 그건 힘들 것 같고...).

"고생 많았소, 삼순씨. 이제 아프지 마시유."

 


* 오마이뉴스 설 기획으로 청탁받아 썼던 글이다. 오름 최상단에 걸리고 포털에도 나가서 꽤 노출이 많이 됐다. 엄마가 보고 막 갈궈서 괴로웠지만 ㅋㅋㅋ 소재를 제공했으니 원고료를 내놓으라나 뭐라나 ㅋㅋㅋ 이제야 옮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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