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9 희망새 뮤지컬 <전태일 서포터즈> 공연 리뷰

'학예회.'
냉정하게 말하자면, 희망새의 겨울 프로젝트 뮤지컬 <전태일 서포터즈>는 학예회 같았다.
몇 달씩 이어서 하는 오픈런 공연이 아닌 이상, 단 이틀 동안 3회만 하는 공연에 지인들이 찾아와주고 축하해주고 좋은 말 해 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지만, 그 이상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걸판의 세혁씨 권유로 보게 된 공연. 희망새가 뭔지 몰랐지만 세혁씨 안목을 믿고 묻따말 스까이를 대동하고 대학로 성균소극장에 갔다. 제목을 듣고서 대충 전태일 열사 관련된 연극이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내용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성균소극장이 성균관대 경영관에 있는 것을 말하는 줄 알고 학교 안까지 들어갔었던 해프닝이 있었지만 ㅋㅋㅋㅋㅋ 연극이 8시 10분에 시작했기 때문에 무사히 시간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노래극단 희망새'란 90년대를 풍미하던 엄청난 노래패로서...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뭐랄까, 거의 전설적인 존재여서... 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었으며... 재학 시절 세혁씨는 희망새 공연을 보고도 너무 황송해 직접 다가갈 수가 없어서 후배를 시켜서 사인을 받아오게 하였으며... 짤방 획득을 위해 희망새 공식홈에 들어가보니 김포에서 부산까지 희망새 공연 섭외를 하기 위해 찾아갔다던 이가 있으며... 아무튼 엄청났던 듯하다. 희망새 출신으로 지금은 엄청 유명해진 영화배우들도 있는데... (이름을 들었으나 잊어버림)

그런데 왜 나는 희망새를 몰랐을까. 내가 평균치보다는 연극을 많이 보는 편이지만 희망새의 극은 일단 상업 연극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단순한 연극에 대한 관심만으로 이 극단을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내가 학생운동판에 잠깐 있었고 지금도 비교적 관심 갖고 지켜보는 편이기는 하지만 요즘 학생운동은 통일운동이나 노동운동보다는 아무래도 대학생들 스스로에게 당면한 현안인 등록금이나 취업, 비정규직 문제 등등에 집중하는 편이기 때문에 통일새를 만날 기회는 역시나 없었을 것이고... 아무튼, 한 때 잘 나갔다던 희망새가 전과 같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전태일 서포터즈>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전태일 열사의 생애를 다룬 연극을 하는 극단이 해체가 됐는데 서로서로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다시 연극을 하게 된다... 는 이야기. 이렇게 써논 것보다는 더 재미있다. 특히 극 초반에 여주인공 은주를 부당해고한 악덕 사장이 알고 보니 그 연극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좋게 하려고 하는 후원자였다는 점은 훌륭한 설정이었다. 연기도 훌륭했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우리 서로 사랑하고 희망을 가지면 다 극복할 수 있어요" 라는 식의 긍정의힘 돋는 서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대사 중에는 극중극에 대해서 "요즘 이런 연극을 누가 보냐, 백프로 망한다"라는 식으로 언급하는 말도 있었는데 이게 사실 아닌가. 배우들이 연극 해서 먹고 살기 힘드니까 투잡 뛰는 설정이 있었는데 "실제로도 그러시냐"라고 물으려다 참았다.

문제는 전태일 열사가 아니라, 통일이 아니라, 극 자체의 퀄리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광주 항쟁에 관심 없는 것 같지만 <화려한 휴가>는 히트를 쳤다. 소재 자체가 구미를 당기는 것이라도 좋겠지만(90년대에는 통일이 잘 팔리는 소재였는지도 모르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걸 잘 담아내면 팔리는 것이다. 어차피 문화예술이라는 것은 상업성도 상업성이지만 그 본령이 사회 고발에 있기도 하기에, 굳이 시어빠진 통속 연애 드립 같은 걸 치지 않더라도 뻔한 소재의 상업 연극들을 상대로 승산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 <전태일 서포터즈>는 많이 부족했다.(대학로에서 웬만큼 잘 나간다는 상업 연극들에도 쉽게 만족 못하는 매의눈인 점을 감안하시길)

연극에는 연극다운 발성이나 규칙처럼 장르의 특성이란 게 있는데 이 극에서는 그런 게 느껴지지 않는다. 뒷풀이 때 대표님과 이야기한 바로는 일부러 일상에서와 같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이 극단만의 개성이니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그런 '연극체의 연극'들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건지 이렇게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연극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는 배우들의 연기력 부족에도 원인이 있을 것 같다. 배우마다 편차는 있었지만 전체적인 연기력이 그닥 훌륭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장기 공연이 아니다보니 연습이 부족했던 걸까.

그리고 뭔가 정제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건 분장에도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분장이란 게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배우를 배우로 느끼게 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대개 연극의 분장이란 큰 극장에서 조명을 비추었을 때 배우의 얼굴이 돋보이게 하려고 하게 되지만 나는 소극장에서도 분장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 극이 아니라도 대학로 소극장에서는 배우들이 특별히 분장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던데 사람 취향이겠지만 난 그런 게 상당히 '없어 보이'더라고... 그 가운데서 여주인공 은주의 (그렇잖아도 큰) 눈에 그려진 언더까지 그려진 아이라인이 자꾸 눈에 밟혀 신경이 쓰였다.

은주 역 맡으신 분 외에는 노래 실력도 이렇다하게 귀에 들지 않았고... 중간중간에 실수 비슷한 것도 눈에 들어오고 아무튼 전체적으로 다소 엉성하다고 느꼈다. GV 시간에 들어보니 리플렛도 그렇고, 최대한 돈을 적게 들여 만들었다고 하기에 그럼 그렇지, 싶다. 이 한 편으로 희망새라는 극단 전체를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극단은 무대에 올리는 극을 가지고 평가 받는 것인데 좀더 신경써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쁘지 않았으나 별로 좋지도 않았다'라는 소감을 가진 채로 어찌저찌 걸판 단원분들과 함께 뒷풀이에도 끼게 되었다. 새벽까지 삼겹살을 포풍섭취하며 뭔가 약간의 심정적 유착을 갖게 되었다.(그게 아니었으면 그냥 희망새에 대해 그렇고 그렇다는 인상을 가지고 다시 마주칠 일이 없었겠지) 그런데 분명 세혁씨나 태현씨나 극단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은 나보다 더 연극도 많이 보고 눈도 더 날카로울텐데 어째서 이렇게 호평만 하시나... 라는 생각이 든다. 삐딱한 나와는 달리 워낙 긍정적인 마인드와 시선을 가지신 분들이라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이 극단에 대해 굉장한 애착을 갖고 보셔서 그런 것도 있을 듯하다.

단지 통일극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노동극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민중 극단을 사랑하고 후원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업 극단의 경우 사실은 아무런 지지기반 없이 시작해서 갈고 닦아 지금의 관객을 확보한 것이 아니겠는가. 온실 속에 자란 화초는 백 날 가도 비리비리하다. 이 극단이 단지 과거 통일운동판의 흥을 돋우기 위한 수준의 활동을 하고 싶은거라면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극을 가지고 승부하고 싶은 거라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적다 보니 많이도 썼네. 관극 후기를 올리겠다고 대표님께 말씀드렸는데 해를 넘겨 약속을 지켰다. 봄 공연도 보러 오라고 초대해 주셨으니 되도록 가볼 생각이다. 혹평했지만 어쨌든 난 희망새가 나아가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그들 나름대로 그리는 청사진이 있을 테니 뭐 그대로 잘 하면 되지 않겠나. 어쨌든 지금처럼이라면 운동판 밖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는 정말 어려울 거라는 게 내 판단이다. 나름 애정어린 안타까운 비평이었다.

ps1. 이 뮤지컬은 '감동 후불제'로서 극을 보고 나서 원하는 액수만큼 봉투에 돈을 넣어 내면 되는 것이었다. 얼마 전 <아큐>도 그랬고, 후불제가 대세인 모양...

ps2. 마침 가방 속에, 전에 후마니타스 책다방에서 가져온 전태일 열사 배지가 있길래 나오면서 전태일 역을 맡으신 배우께 선물했다. 뮤지컬 잘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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