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문화 생각. 그 때 나눔문화는 왜 나에게 자기탐구일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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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광화문 교보에 갔었다. 잡지와 만년필을 사들고 나와선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세종문화회관을 바라보며 신호등 불빛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혼자 울컥하고 말았다.

사실 광화문에 나오면 자주 울컥하곤 한다. 서울의 중심, 광화문. 충무공과 세종대왕의 동상이 있는 곳. 광장이 있는 곳. 바닥분수가 있는 곳. 시민들이 많이 나와 즐기는 곳. 오늘처럼 날씨가 좋으면 눈이 부시는 곳. 드라마 <아이리스>를 찍은 곳.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언제나 전경 버스가 상주한 곳. 날마다 온갖 행사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곳. 그래서 허구헌 날 교통 통제를 하는 곳. 오늘은 노무현재단에서 남북정상회담 몇주년이럤나, 아무튼 기념 사진전을 하고 있던 곳. 상경 일년차 새내기가 촛불집회 때문에 처음 와보게 된 곳. 날마다 이곳을 누비고 여기서 밤 새고 물대포 맞고 소화기 맞고 전경 버스위에 오르고 난리치던 곳. 참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도 일어나던 곳. 그래서 웬만한 서울사람보다도 빠삭하게 지리를 익히게 된 곳.

그리고 광화문에는 나눔문화 사무실이 있다. 오늘 울컥한 건 그 때문이었다. 세종문화회관 너머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는 골목길을 따라 가면 그 사무실이 있다. 나는 그곳에 딱 두 번을 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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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밖에 가지 못했던 건 그곳에서 나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일학년이 끝난 겨울이었다. 1월이었던 것 같다. 학교 선배들과의 해묵은 갈등이 결국 폭발해 크게 싸우고 탈당을 한 즈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해서 '운동'을 하고 싶었고 학교에서는 그걸 이어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밖으로 눈을 돌렸다. 찾아낸 게 나눔문화였다. 촛불집회를 통해 인지도가 높아진 단체라 전부터 알고 있었고, 평화나눔 아카데미에 참가했던 선배언니로부터 호평을 들은 바였다. 인터넷 검색 몇 번만에 '대학생 나눔문화'라는 모임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곳 코디네이터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을 취했다. 토요일에 모임이 있으니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어려운 골목길을 찾아갔다. 모임의 내용은 일종의 스터디 같은 것이었다. 마악 용산 참사가 지나간 후였다. 용산 참사와 관련된 MBC 뉴스를 함께 시청하며 토론했다. 곧이어 누군가 발제를 하고, 토론을 했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게 기억난다. 오전에 모였는데 밤까지 함께 있었다. 같이 밥을 해 먹고 간단히 술도 마셨다. 박노해 시인도 잠깐 뵈었다. 나는 또 천방지축,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처럼 떠들어대었을 것이다.

권위적이고, 언제나 정신없이 바쁘고, 비장함이 물씬하던 민주노동당과는 확연히 분위기가 달랐다. 형식적으로 새내기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실은 후배를 교양하는 데만 목적이 있던 당 선배들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진심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토론했다. 그래서 차라리 답답하다면 답답했지 어느 한 사람도 억압하거나 '바쁘니까'라며 대충 주워섬기고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그래서 난 좀 답답해했다. 나는 나이에 비해 잘 말하고, 똑똑하고, 성격은 급한데다가 토론에서 지는 일이 별로 없는 애였으니까. 당 선배들이 언제나 골치아파하던, 도무지 고분고분 말을 안 들어먹던 그런 새내기였으니까. 하지만 새로이 몸담을 수 있는 조직이 생긴다는 설렘에 그런 답답함은 묻혀버렸다. 생소한 기분이 많이 들었지만 처음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이 모임에서 내가 어떠한 포지션을 취해야 옳은 것인가,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 부정하고 싶던 그 조직에 나는 이미 너무나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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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주 후, 대학생 나눔문화의 코디네이터는 나를 사무실로 불러 '박솔희 씨는 대학생 나눔문화와 함께할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전해 왔다. 첫 모임에서의 내 모습과 이후 주고받은 이메일에 근거한 평가라고 했다. 오랜 시간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나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잘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지금 떠나는 게 나을 거라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에는 늘 일할 사람이 부족했다. 표도 필요했다. 그래서 언제나 단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려고, 더 조직화하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진입장벽이란 굉장히 낮았던 거다. 당연히 나눔문화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나에게 나눔문화는 '우리는 당신 같은 사람 필요 없소'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두고 총학생회나 정당에서 활동하는 게 잘 맞을 것 같다고 조언해 주었다. 나눔문화에는 맞지 않을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화가 나고 눈물이 났고 할 말이 없었다.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코디네이터는 나에게 미안해하는 것 같았으나 그의 결정은 단호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니, 한 사람의 후원자나 일꾼이라도 귀히 여겨야 할 곳이 NGO가 아닌가? 촛불집회로 좀 유명해졌기로서니 이렇게 콧대가 높아도 돼? 나는 총학생회, 정당에 맞지 않아 그곳을 부정하고 저주하며 대안을 찾아 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보고 다시 거기로 돌아가라니. '억울'했던 것 같다. 도대체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 막막하기도 했다. 많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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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새 학기를 맞아 나는 공부를 참 열심히 했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장학금도 꽤 많이 받았다. 하지만 마음 한 켠은 늘 허했다. 갑갑했다. 특히 신문이나 뉴스를 볼 때 그랬다. 나는 혼자 용산 참사 현장에도 가고 노 대통령 서거 때는 분향소에도 갔었다. 외로웠지만 그 뜻만은 옳다는 걸 알아서 나는 계속 꿋꿋이 서 있었다. 어쩌면 그 꿋꿋함은 뻣뻣함이어서, 내가 속할 곳, 내게 맞는 자리를 알 수 없었던 나는 더 이상 묻기를 멈추었다. 그냥 뙤약볕 아래 굳게 나문 입매로 다만 시니컬하게 서 있기만 했다. 참 뾰족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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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한 해를 간신히 견뎌낸 뒤 나는 서울을 떠났다. 나는 많이 가라앉았다. 내 안으로 깊이깊이 침전해 들어갔다. 그간의 망나니 생활이 자신을 지치고 또 너무나 들뜨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물밑에 가라앉은 흙을 휘휘 저어 흙탕물을 만들어 버린 것처럼. 나는 몸도 마음도 차분해지려고 애썼다. 아니, 굳이 애쓰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되었다. 한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연락도 별로 하지 않았다. 글을 많이 썼다. 책을 많이 읽었다. 차를 마시고 자전거를 탔다. 여행을 했다.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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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한때 지긋지긋하던 서울 생활이 이제는 아주 좋아졌다. 학교 생활도 즐겁다.

지난 주에 만행에 다녀오고 나서 나눔문화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만행 스프링보드 어디에선가 나눔문화 이야기를 보아서 그랬다.

만행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예전의, 복작대던 수준을 넘어서 overcrowded하던 옥탑방과 달리 새로이 마련한 행간은 아담하고 좋았다.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공동체의 공간을 가져보지 못한 나로서는 참 재미있게 여겨지는 곳이었다. 옛 인연들이 한두 꺼풀씩 벗겨져 나오는 것도 좋았다. 약간 과장하자면 고향에 온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만행과 나눔문화가 무언가 상관이 있다, 는 생각이 들자 나는 겁이 났다. 사실 두 그룹의 정치적 포지션은 표면상 꽤나 유사해 보인다. 어쩌면 나눔문화가 그랬듯, 만행도 나를 쫓아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눔문화에 맞지 않았듯 만행에도 맞지 않는 인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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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오늘 나는 그것과 반가이 인사했다. 거의 이 년이 다 되어가는 기억을 더듬어 저 골목 어딘가 있는 나눔문화 사무실을 찾아가 '그 때 나에게 왜 그랬나요'라고 물어볼까, 라고 까지 생각했었다. 왜냐면 그 때 그 코디네이터의 판단은 틀린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는 정당에도, 총학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차라리 냉소하고, 외롭고, 철저한 개인으로 남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많이 변했다. 사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 생명력 있는 자라면 변화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닐까. 내가 어떻게 변할 줄 예상하고 지레 나를 거절했단 말인가. 나는 그냥 궁금했다. 나의 어떤 점 때문에 그랬냐고. 그 때 코디네이터는 나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나는 나눔문화에 대한 상념 따윌 잊었다. 글쎄, 날씨가 너무 좋았으니까. 버스를 타러 세종문화회관을 지나는데, 세종미술관에서 '박노해 사진전'을 하고 있었다. 왜 그 순간 나눔문화가 떠오르지 않았나 모르겠다. 그냥 사진을 보고 싶었다. 한가한 일요일이고, 날씨도 아주 좋았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를 구경하고 집에 돌아가서 오늘 산 잡지들을 읽으면 훌륭한 하루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기뻤다. 스태프들이 모두 나눔문화 연구원이었다. 그 코디네이터는 나를 알아보았다.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서로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얼굴은 기억했다. 그는 내게 졸업을 했냐고 물었다. 내가 그 때 일 학년인 것을 잊었던가보다. 나는 만행을 언급했는데, 의외로 그는 만행에 대해 잘은 몰랐다. 나눔문화 활동가 중 한 명이 만행에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어쩐지, 나는 그 대목에서 안심하고 말았다. 만행이랑 나눔문화는 별로 상관없는 조직이구나. 나눔문화가 나에게 한 일을 만행이 나에게 하리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나는 사진을 더 둘러보았고 도록을 샀다. 나와 직접적인 안면은 없는 연구원들도 참 친절했다. 다시 나눔문화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많이 변하고 철이 들어서, 이제 그들이 나를 내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 참여하면서, 남은 상처를 씻어내고 싶었다. 나는 나눔문화를 원망한 적이 없으나 상처받았던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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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다. 그동안 나는 나눔문화를 원망하지 않았다. 미워하지도 않았다. 미워하고 원망할 만큼 깊이 관계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어리지만 이 년의 시간 동안 두 살 만큼은 철이 들었으니, 성숙하게 밝게 인사했고 성숙하게 화해하고 싶다.

8.5
나눔문화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어 있다. 관계의 패턴이란 한 번 굳어져버리면 돌이키기 어렵다. 내가 나눔문화와 비교적 쉽게 화해한 데 반해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는 그게 안 된다. 아직도 옛 선배들을 보면 반가이 인사하기 어렵다. 사실은 오늘도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보았는데 인사하기 싫어서 못 본 척 도망쳐 버렸다.

학교에 있다 보니 너무 자주 마주쳐서일까. 한 이 년 쯤은 못 봐야 조금이나마 반갑게 인사할 수 있을까.

당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실 가족이다. 더 철 없을 때 만난 만큼 더 철 없는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의사선생님은 아빠를 용서해야 내 몸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도저히 아빠를 용서할 수가 없다. 세상 어떤 자식이 부모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나 도저히 용서는 못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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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철이 든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일까? 성숙해진다는 것은 꼭 바람직할까?

철이 들고 있으면서도 의문이다. 이 가을 단풍 들듯 지금처럼 열심히 철이 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좀더 버텨보아야 할는지 모르겠다. 나뭇잎은, 스스로 붉어지기를 바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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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0/10/10 23:4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미운오리 2010/10/12 00:51 #

    고맙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제가 너무 어리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오늘도 또 철없는 짓 하고 들어와서 ㅠㅠㅋㅋ 그렇다고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리는게 좋은 걸까, 고민이 되어요. 어쩌면 나뭇잎은 그저 스스로 푸르게만 빛나고 싶은 걸지도 모르잖아요.
  • 소박하고도 2010/10/11 10:39 # 답글






    페이스북 좋아요 연동 하는 건 어떻게 하는건가요?
  • 미운오리 2010/10/12 00:52 #

    이글루관리-부가기능-외부SNS 연계에 있어요^^ 페이스북 외에 트위터, 싸이도 달 수 있는데 그나마 자주 쓰는 게 페이스북이라 저는 페북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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