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명절 귀성 자기탐구일지 2010

집에 내려왔다. 추석이라고 집에 내려온 것, 처음이다. 작년도 재작년도, 주말과 겹친 연휴가 너무나 짧기만 해서, 그리고 말로만 듣던 '귀성길 정체'라는 게 너무나 두렵기만 해서 집에 안 갔다. 작년 추석은 알바를 하며 보냈고, 재작년엔 친구들을 만나 놀고 서울에 있는 큰집에 가서 지냈다.

올해 집에 오기로 한 건, 이제 주말마다 알바를 하니까 집에 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마땅히 서울에 있어도 할 게 없기 때문이었다. 하숙집 아주머니도 쉬시고, 다른 하숙생들도 다 집에 가고 나면 괜히 쓸쓸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알바를 하게 되면(명절 때는 시급이 1.5배이므로!) 서울에 있을까 했지만 그것도 아니어서, 뒤늦게 딱 1장 남은 버스표를 예매했다.

감기 기운이 아직 조금 남아 있어서 몸은 좀 힘들었지만, 집에 오니까 좋다. 특히 오늘 서울에 '물폭탄'이 떨어졌다는 뉴스를 보면서, 제 때 귀성한 게 너무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젯밤, 평소 2-2.2시간 소요되는 거리를 3시간 만에 무난하게 도착했다. 신세계 강남점에서 엄마 선물을(음력 8월 13일은 우리 엄마 생일이기도 하다) 고르다가 예매한 7시 50분 버스를 놓치는 멍청이짓을 저질렀지만, 다행히 8시 차(막차였다! 이걸 놓쳤으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에 빈 자리가 있어 그대로 타고 올 수 있었다.(사실은 오히려 좋았다. 내가 산 표는 추석 임시 특별편이라 일반이었는데 8시 차는 우등이었으니까.)

고속터미널역에서 연결된 신세계 강남점은 엄청나게 북적였다. 백화점 선물코너를 보면서 이런 게 뉴스에서 쓰는 표현 그대로 '명절 귀성객 행렬'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다들 한 손에는 트렁크, 한 손에는 선물꾸러미를 들고 피곤하지만 들뜬 표정으로 오가고 있었다. 내 기분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선물을 산 뒤 다시 지하 1층으로 내려와 달루와요에서 과자세트를 사 가지고 가야지, 마음먹었다(결국은 택시 타고 남부터미널까지 달리느라고 못 샀지만). 우리 동네에는 없는, 서울에만 있는 선물을 사들고 귀성하고 싶었다. 먹기는 동생이 먹고 엄마는 좋은 듯 싫은 듯 좋아하고 아빠는 관심도 없겠지? (ㅋㅋ)

북적이는 백화점을 떠나 북적이는 터미널에 이르고, 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더 이상 복닥대지 않았다. 불이 꺼지고 난 이내 잠들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차는 밀리지 않았다. 미리 너무 겁을 집어먹어서였을까? 9시가 되니 뉴스가 시작했고, 첫소식은 귀성길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화면은 엄청나게 붐비는 안성휴게소의 모습을 비추어 주었는데, 얼마 후에 버스가 안성휴게소를 지나쳤다. 그 께서 많이 밀린댔는데 확실히 그랬고, 열 시쯤 천안을 지난 뒤에는 별다른 정체 없이 한 시간 만에 계룡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이어진 대전충남 뉴스에는 대백제전 얘기가 나왔고, 우리 동네에 있는 '계룡시 용남고' 학생이 나와서 인터뷰를 했다. 그 버스에 있던 누군가와 두어 다리만 걸치면 아는 사이였을 건데. 피식 혼자 웃었다.)

흐린 날씨 때문일까, 안개가 심했다. 천안휴게소의 가로등 주변마다 담배연기마냥 희뿌옇게 수증기가 비치고 있었다. 천안휴게소에서 십오 분을 쉰다고 했다.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그나마 사람들이 너무 많아 기다려서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가득한 편의점과 음식 가판대와 식당 들을 기웃댔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명절 분위기라는 거. 날은 흐려도 사람들의 마음만은 밝아 보였다.

열 시가 지나니 버스 안에 있는 TV에선 <동이>가 나왔다. 드라마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할 일이 없다보니 그냥 봤다. 단조로운 창 밖 풍경도 나름 흥미롭게 구경했다. 어릴 적, 아빠 차에 실려서 온갖 멀미를 해 가며 이렇게 고속도로를 기어가곤 했었지. 높은 버스 좌석 위에서 내려다보는 승용차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싣고 있었다. 양복을 옷걸이에 걸어둔 채 편한 차림으로 운전하는 아저씨와 그 가족들. 자매일까? 앞자리에만 둘이 타고 이동하는 아주머니 둘. 이 버스 안에 탄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옆자리 아주머니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도로사정에 대해 통화하고 있고, 앞에는 나보다 어려보이는 여학생들이 두엇. 코딱지만한 동네라고 생각해도 이 버스 안에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흠흠. 이 작은 동네에서 다들 뭘 해먹고 사는 거지?

마침내 우리 동네, 익숙한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으로 겪어본 명절 귀성은 걱정처럼 힘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에게 선물을 안기고 온갖 생색을 다 냈다. 명절 귀성. Homecoming. 명절 때마다 부모형제를 그리며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고단한 몸을 차에 싣는 일. 피곤해도 다들 매년 두 번씩 꼭꼭 반복하는 일. 남들 다 하는 일을 처음으로 해 보니, 어른이 되기까지 겪어야 할 관문을 또 하나 넘은 기분이었다.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치르는, 반복되는 의례 같은 것. 스스로 이 사회의 구성원에 좀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차가 밀리고 어려워도, 왜 다들 그렇게 애써 집에 가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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