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좋아하는 쪽이, 훨씬 유리한 거라고 생각해." 책 리뷰

아파서 감기약 먹고 자려고 포복해 있다가 영 잠은 안 오고 해서 이 녀석을 다시 꺼내 봤다. 데뷔 때부터 팬인 윤지운 작가의 만화, <Hush>. 영 입맛에 안 맞는 몇 권만 빼고 윤지운 작가의 단행본은 다 갖고 있다. 요즘에도 신간이 나오는 족족 사 모으고 있고. 무려 사인회 때 사인도 받은 적이 있는데, 서재 어디엔가 찾아보면 있을 거다. <Hush>는 윤 작가가 프로로 데뷔해서 정식으로 연재한 첫 작품이다. '밍크'라는 만화잡지에 연재했었는데, 지금도 그게 있나 모르겠다. 아마 없어진 것 같고, 요즘은 다 온라인으로 연재가 이루어지는 모양이다.(짤방 찾으려고 예스24 들어가보니, 만화책이란 게 대개 금방 그렇게 되지만 이거 절판됐다. 음. 나온지 몇 년이나 됐으니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뭔가 희귀한 거 갖고 있는 거 같아 기분 좋다.)

유치하다고 해도 할 수 없고, 실제로 몇 년 만에 다시 보니 좀 유치하긴 하다. 초중딩들이 주 독자인 만화잡지에 연재된 것이었으니. 내가 윤지운을 알고 좋아하기 시작한 때가 중딩 때였던가, 아마. 그 때는 딱 눈높이가 맞았는데. 어릴 땐 그저 환상처럼 보이던 만화속이 지금은 아주 냉정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지금은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고, 뭐 만화니까 그렇다 쳐버리자. 어쨌든 만화라는 장르의 본질적인 특질을 떠나서 내가 윤지운 작가의 만화를 좋아하는 건 가슴을 울리는 독백들과, 재치 넘치는 대화들, 그리고 선이 매끄럽고 시원시원한 그림체 때문이다. <Hush>의 경우는 초기작이라 미흡한 점이 많이 보이지만 낭중지추로 분명한 작가의 재능을 느낄 수가 있는데, 도대체 윤지운 만화의 주인공들은 어쩜 이렇게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주관이 뚜렷한 건지 한 명 한 명 부럽다.

연재 대상의 연령층이 높아져 별로 유치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최근작 단행본들도 다 갖고 있지만 굳이 <Hush>를 꺼낸 건, 용기가 필요해서다. 나랑 아주 비슷한, 그리고 아주 씩씩한 아가씨가 한 명 등장한다. 주인공은 아니고, 서브스토리의 히로인인 홍시호다. 진심을 고백해도 쌀쌀한, 시호를 애 취급해 버리는 상대를 두고 그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처음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도록
진심을 전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운 좋게도 상대가 마음을 받아준다면 이쪽의 승리.
지치고 지쳐 포기한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자신의 선택.
사랑받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쪽이 훨씬 유리한 거라고 생각해.


'금사빠'인 것도, 다만 진심을 전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도, 나 좋다는 남자 다 두고 늘 어려운 상대에게 콩깍지가 씌여 있는 것도, 한 번 사랑에 빠지면 물불 안 가리고 자신을 소모해 버리는 것도, 그녀와 나는 참 닮았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나이차도 똑같이 열 살씩이다. 나중엔 조금 지쳐서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참 꿋꿋하다. 사람 좋아하는 일에 이기고 지고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표현이 좀 어색할진 몰라도, 그녀처럼, 나도 '승리'할 수 있을까. 현실이 만화같지 않기에, 그녀와 내가 아무리 닮았어도 결과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냥 부딪혀 볼 테다. 진심을 전한다면 후회는 하지 않을 테니.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그건 사실 사랑받는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이미 훨씬 유리한 상태에 있으니까.


덧글

  • amitys 2010/05/26 11:00 # 답글

    안녕하세요 밸리 메인에서 보고 왔습니다.

    사실 제목만 봤을 때는 과연 그럴까라고 생각했지만 내용을 보다 보니 동감하게 되네요.
    너무 꿋꿋한 정신이라 전 따라할 수 없을 거 같지만;;

    하여간, 그 주인공처럼 있는 힘껏 후회없이 부딪혀보시길 바랍니다!
  • 미운오리 2010/05/26 14:07 #

    헤헤, 고맙습니다! :)
  • 미도리 2010/05/26 13:00 # 답글

    오.. 난 유리한건가 >.<
  • 미운오리 2010/05/26 14:07 #

    ㅇㅇ ㅊㅋㅊㅋ!
  • 오플린 2010/05/26 17:31 # 삭제 답글

    저희 아버지 어머니도 열살 차이입니다! 힘내세요^^
  • 미운오리 2010/05/27 03:10 #

    나이가 문제가 아닌거같아요. 흙.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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