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희망과 하나의 절망을 보았다. 자기탐구일지 2010

어제오늘, 서울에 다녀왔다. 일요일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어제까지 이어져서 운이 나쁘네, 생각했지만 다행히 내가 서울에 도착할 즈음엔 그쳤다. 운이 좋네.

그간의 잉여로운 일상과 엄청나게 대비될 정도로 알찬 1박 2일을 보냈다. 우선 학교에 가서 친구를 만났고, 회현역의 LEFT21 사무실에 들렀다. 저녁엔 상암동의 CJ 미디어그룹을 방문해 PD님들과, 앞으로 함께 <백지연의 끝장토론>에 패널로 출연하게 될 것 같은 대학생들을 만나 여러 토론과 재잘거림을 나누었다. 그리고 안산 한대앞에 가서 (예정에 없던 거지만) 죽도록 과음...하고 완전 후회하고. ㅋㅋㅋㅋㅋ

- 웬만해선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나다. 실수도, 잘못도 다 추억거리가 되고 이야기가 되고 경험치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음'만은 진짜 아닌 거 같다. 과음은 숙취가 될 뿐이지 추억도 이야기도 경험치도 되지 않는다. ㅋㅋㅋㅋㅋ (레베루 업쁘는 될까?) 뭐, 내가 신나서 들이켜댄거니까, 뭐 그 시간만큼은 정말로 즐거웠으니 그걸로 된 걸로 치자.(지금은 속이 괜찮으니 할 수 있는 소리다.)

오늘은 학교에 들러 오랜만에 아는 언니를 만났고,(숙취로 인해 예정했던 전시회는 보지 못했다) 마침 총학에서 연락이 오길래 소송 건에 대해 논의차 총실에도 들렀다. 그리고 강남에서 마사지를 받았고(근육긴장으로 어깨와 팔이 엄청나게 뭉쳐 있어 주기적인 마사지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 마치 주기적으로 침을 맞아야 하는 할머니 같다. 이런 노인네. ㅠㅠ) 저녁약속은 어찌저찌 취소돼버려 피곤한김에 잘됐다 하고 냉큼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탔다.

(99%는 과음으로 인해) 피곤해 죽겠지만, 왠지 잠도 오질 않아서 가지고 간 책을 다 읽고 코코펀도 다 읽고(이걸 읽다니, 나 뿐일거다) PAPER라는, 낯익지만 한 번도 펼쳐본 적은 없는 잡지도 사서 읽었다. 가판에서 조금 고민하긴 했지만, 좋아서하는밴드와 루시드폴의 인터뷰가 있어서 냉큼 살 수밖에 없었다. LEFT21과 숙대신보와 대학내일도 더 읽고 싶었는데, 내 느린 독서속도를 생각하면 영등포-계룡 간 2시간 남짓으론, 한계였다.

- 뭔가 제목과 동떨어진 거 같은 술먹고 책읽은 얘기 같은 신변잡기를 늘어놓고 있지만(낚시질당한 기분을 느끼실지도) 이건 엄연히 일기니까 상관없다. 하히후헤호

이틀간, 나는 자본에서 희망을 운동에서 절망을 보고 왔다. 빌어먹을, 그래서 좀 우울했다. 하지만 굳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괜히 더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왠지모를 한쪽에의 동질감 내지는 연민때문에, 나까지 열패감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기도 했다. 아, 그러니까 '절망'이라고 표현하는 건 좀 너무 절망적이다. '실망' 정도로 바꿔볼까?

케이블산업을 독과점하고 있는 CJ 미디어그룹을 싫어하면서도 일단 부르는대로 올라갔던 건, 그곳에도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작년 말,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학회 커리큘럼상 우리학교 졸업생인 조선일보 기자의 특강을 들을 일이 있었다. 편견을 갖지 않으려 노력... (아, 뻥이다. 솔직히 별로 노력하진 않았고) 그냥 삐딱하게 봤다. 그래도 우리학교 선배라 째려보진 않았다.(읭?)
강의는 뭐 그냥 스펙 열심히 쌓아라 이런 얘기여서 좀 짜증났지만,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해주어 좋았다. 솔직하게 궁금한대로 다 물었다. 그랬더니 그 선배는 자기가 그간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을 찍고, 노무현을 찍었다는 말을 해주었다. 조선일보 바꾼답시고 들어가서 좌절을 한다거나 물이 든다거나 이런 사람들 얘기는 뜬구름 잡듯이 좀 들어봤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내 눈앞에 있는 조선일보 기자가 그렇게 자기들이랑 싸우던 노무현을 찍었다고 말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또한 주변에 그런 동료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뭐 여러 질의응답이 오갔고 맥락상 내 머릿속에 남은 건 '역시 조선일보.ㅗ 나의 삶의 질과 정신의 안정을 위해 혹여라도 절대 조선일보 들어가지 말자'가 되긴 했지만, 조금의 신선함도 없던 특강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외에, 최근 SBS에서 인턴을 한 (좌빨인ㅋㅋ)지인이 엄청 진보적인 담당 PD한테 완전 이쁨을 받았던 얘기를 들은 거라든지, 몇 가지 계기를 통해, 거리에 SBS카메라가 나타나기만 하면 욕을 하던 중 한 명이었던 게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자신의 계급성이나 속한 단체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운동가보다는 생활인이 더 많은 게 현실이고 정상 아닌가. 그 사람들은 자기의 일을 할 뿐이다, 라며 전부 끌어안아 주고 싶지는 않지만, 늘 투쟁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씩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좀 절절히 느꼈달까.

티나지 않는다. 거짓말쟁이라 욕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일보가 가카의 독도드립을 단독보도했던 걸 상기하자. 그곳에 사람이 있다. 싸우는 사람들이, 우리의 동지들이 있다. 선정적인 방송으로 유명한 tvn에서 시청률도 나올 리 없고 광고가 붙을 리도 없는 토론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며 지상파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거기에 있더라. tvn이라는 한계, CJ라는 한계가 있겠지만 역으로 이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귀 얇다고, 거기 가서 맥주 한 잔 얻어먹고 홀라당 넘어간거냐, 그거 어지간한 막장토론 아니더냐, 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난 거기 사람이 있는 걸 보았고, 희망이 있는 걸 보았다. 공교롭게도 첫 녹화일이 내가 캄보디아로 출국하는 날짜와 겹쳐(PD님은 출입국관리소에 찔러 출국금지를 시켜놓겠다 어쩌구 했지만ㅋㅋㅋ) 당장은 모르겠지만, 책이 나오고, 20대론에 관한 훌륭한 사회과학서의 저자로서(아진짜소원이다.ㅋㅋㅋㅋㅋ) 끝장이고 막장이고간에, 토론 잘 해봤음 좋겠다.

절망에 대한 이야기는 이거다. 총학생회의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문건유출 사태로 인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했다. 이미 전화로 몇 번 들었던 이야기고, 피해자 10명 전원은 아니어도 소송에 참여하는 사람이 서넛은 된다기에 어쨌든 나도 참여의사를 밝혀두었던 바가 있다. 내일이랬나, 민변에서 온다 했다. 마침 서울이었고, 마침 학교에 가는 길이어서, 그럼 내가 올라가서 얘기하자고 했다. 좋다고 했다.

총실에 갔다. 아, 빌어먹을. 난 눈치챘어야 했다. 아니, 기억했어야 했다. 이 인간들은 도무지 사람이 지방에서 차비를 들여 올라왔거나 말거나 상대에 대한 예의도 배려도, 도덕성도 프로근성도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었다. 물론 오늘은 내가 이거 땜에 온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수요일에는 '당연히' 민변에서 오거나 말거나 올 수 없다고 하니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 당연한 거 아닌가? 학교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에는 반대하면서, 일방적으로, 나와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스케줄을 정한다거나(그것도 오늘 전화해서 내일 소장 쓰자는 게 말이 되냐) 내가 자기들 5분대기조쯤으로 알고 오라가라 한다거나, 게다가 소장 쓰는데는 본인이 올 필요도 없다. 내가 예전처럼 순진했다면 오라는 대로 와서 멍하니 총실에서 시키는 대로 수발이나 들고 앉았다가 지장 찍고 차비 만원 들여 집에 내려갔겠지. 아, 빌어먹을, 별로 뭔가 기대한 것도 아니긴 했지만 어떻게 1년 전, 2년 전과 이토록 똑같지?

운동을 한다는 이들이, 운동을 하지 않는 이들만큼의 상식이나 배려도 없다. 비싼 차비를 들여 사람을 오라가라 해놓고 고압적인 태도로 사실은 비굴한 내용의 핑계를 대면서 행사가 취소되었다고 하질 않나, 별로 끌리지 않지만 존나 중요한 행사래서 알겠다고 가겠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들은 내용과 전혀 다른 행사였는데 이에 대해 다시 연락 한 번 주지 않는다거나, 사람을 소모적으로 쓰고 버리고, 오라고 해서 오면 일 시키고 안 오면 욕하고 이런 인간들이었던거다!!! 아 쓰면서도 화가 난다.

결국 오늘 총실에서 머무른 40분 남짓한 시간동안 내가 한 일은, 1 내가 총실에 방문한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는 어떤 방문자를 거의 총학 집행부원이라도 되는 양 성실하게 안내해 준 것(아니 총학에 물으러 왔는데 나를 왜 불러. 나한테 물어볼 순 있지만 떠넘기는 건 아니지.), 2 역시 내가 총실에 방문한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별 관심 없는 학내 사안들에 대해 자기들 일하는 와중에 떠드는 소리 듣고서 세세히 들은 것(결국 기삿거리가 되었으니 도움이 되었다면 되었지만 왜 사람 데려다놓고 딴짓이란 말이냐, 정말 예의가 없다), 3 소송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알고보니 총학생회 성원과 나를 포함해서 4명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아니 아직 연락도 제대로 안 돌렸단다. -_-), 4 이 말을 듣고 나는 그런 식이라면 소송을 하는 의의가 전혀 없으므로 참여자가 더 늘지 않는다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 5 그리고 다른 피해자들에게 아직 연락도 제대로 안 취해놓고서 변호사부터 불러 소장 쓰자는 식으로 일을 졸속 추진하는 태도에 대해 화를 낸 것과, 6 그랬더니 나에게 피해자들에게 '니가 한 번 연락 해 볼래?'라는 개소리를(아 진짜. 나는 절대 총학생회 성원도, 별로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니네들 시다바리는 더더욱 아니란 말이다. 난 더이상 체인지 선본원이 아니라고!!! 이건 정말 개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듣고 어이를 상실한 것과 7 정견이나 논리로 싸워도 모자랄 판에 실무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나 개념도 없는 이 총학에 대해 뜨악하도록 기가 질린 것 등이었다.

쓰다보니 너무 감정적이 되었는데, 정말 이대로라면 학생운동의 미래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빌어먹을. 절망이다, 절망.

결국 기자들에게 구조조정에 대해 제보 연락을 하는 건 얼떨결에 내가 떠맡았다. -_- 귀찮으면 그냥 안할란다, ㅅㅂ. -_- 내 기사나 쓰고 말지. 사안이 있을 때마다 매번 문자를 보내주시는 모 대학 총학생회장님과 엄청나게 비교가 되어서, 어제 그렇게 과음하고 후회했지만 또 술 생각이 날 지경이다. -_- (아, 그 모 대학 총학을 생각해보면 학생운동 전체의 미래가 없다고 싸잡아 말할 수는 없는 거겠군! 다행인거신가.)

애초에 많은 걸 기대한 적도 없지만, 이건 아니어도 너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발 한 번쯤은 나도 그들을 인정하고 싶다. 매번 통화할 때마다, 만날 때마다, 들릴 때마다 이렇게 열폭하고 싶지 않다. 학교 본부 때문에 복학하기 싫었는데 이제 총학 때문에도 학교 다닐맛 안난다. 빌어먹을-!!

p.s. 쓰고 나서 차분히 읽어보니, 역시 나는 운동권에 대한 반감이 굉장히 강한 거 같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니 좀 감정적으로 쓰였을진 몰라도 틀린 말은 없다. 그리고 또다시 생각해보니, 또한번 빌어먹을, 이지만, 비판도 애정이 있으니까 하는 거라는 말, 진리다. -_ㅜ



덧글

  • 뒤죽박죽 2010/03/17 15:32 # 삭제 답글

    비판도 애정이 있어야 한다 ㅋ
  • 미운오리 2010/03/17 16:16 #

    실컷 욕해놓고서도 뭔가 가슴이 아픈 걸 깨달았음. -_ㅜ
  • 백치미 2010/03/20 00:40 # 삭제 답글

    - 이런 말이 실례가 아니라면 귀엽구나...실례였다면 용서하길
  • 미운오리 2010/03/20 00:51 #

    ㅋㅋ 총학생회비 자율납부 갖고 열내던 저에게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던 선배들 생각하면.. 납득가는 반응임미당 ㅋㅋㅋㅋㅋㅋ
  • 2010/05/23 09:31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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