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갑니다. 굿바이 서울 자기탐구일지 2009

  12월 21일로 이사 날짜를 확정했다. 14일에 기말고사 끝내고, 16일에 학회참석하고, 20일에 새세대 모임까지 착실하게 참석하고 떠난다. (난 역시 좀 성실한듯 ㅋㅋㅋㅋㅋ) 그 사이에 미루고 못 만났던 지인들과 회포를 풀 예정이다.

  서울에서 이렇게 떠돌며 산 게 2년이 찼다. 시흥동의 큰집에서, 학교 기숙사에서, 그리고 이 옥탑에서. 다사다난하게 '저학년' 시절을 보냈다. (벌써 대학을 절반이나 다녀버렸다니. gg)
  언제나 내가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는 원인인데, 나는 참 많은 '정체'로 살았다. 새내기 여대생. 학교 홍보대사. 촛불. 운동권 대학생. 민주노동당 당원. '스펙' 좋은 일종의 사회적 winner. 때로는 모범생. 장학생. 때로는 looser. 진보적인 개인. 등등등. 상충되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어서 참 고민 많던 시절들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해결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실타래. 철푸덕 주저앉아 날 잡고 달 잡고 풀려고 휴학을 결심했다. 워낙에 활동적인 성격 탓에 일부 지인들은 내가 겨울방학 끝나면 '심심해ㅠㅠ'이러면서 다시 서울 올라올 거라고 믿고 있기도 한데, 내게는 '셰익스피어 베케이션'이 필요하다. 영국 여왕이 관료들에게 책 읽으라고 몇 달씩 줬다던 그 휴가. 뭐 가끔 서울이야 오가겠지만, (그리고 이미 온갖 여행과 자원봉사로 겨울방학 계획을 꽉 채워둔 게 좀 불안하기도 하지만) 일 년 이내에 복학하진 않을 테다. 책 읽고 글 쓰고 생각할 거다. 나름대로 결론을 얻기 전에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다.

  오늘 종강한 한 수업의 교수님께 따로 인사를 드렸다. 평소에 내 의견을 많이 지지하고 조언해주시던 고마운 분이다. 긴 말 없이 꼭 안아 주셨다.(순간 내 마음 속 애정인물 1위인 한비야 단장은 2위로 밀렸다. ㅋㅋㅋㅋㅋ) 휴학한다고 했더니 끄덕끄덕해 주셨다. 꼭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지켜보고 있겠다는 말씀 잊지 않으셨다. 나태해지지 말라고 하셨다. 가끔 메일 보내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교수님 말씀을 전부 따르지는 못할 것 같다. 나태해질 것 같다. 나는 마음껏 나태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나태한 자신을 채찍질하며 더 부지런하게, 더 열심히 살고자 한다. 그건 우리 사회의 '위너'들이나 운동가들이나 마찬가지다. 늘 더 나은 '스펙'을 위해 잠도 잊고 밥도 잊고 애쓴다. 늘 '혁신'을 위해 잠도 밥도 잊는다. 글쎄, 열심히 사는 게 나쁜 건 아니고 그러다보니 비슷한 꼴이 되는 거긴 한데, 그 이상한 중첩이 나는 영 거슬렸다. 왜일까. 사실은 그가 진짜 '위너'가 아니었기 때문일거다. 양편 모두 마찬가지다. 결국 진짜 위너들이 군림하는 모래성을 다져주는 개미 노릇만 하는 거다.

  나는 마음껏 나태하고, 마음껏 심심하게 지내겠다. 사실 그게 더 어려운 것 같긴 하다. 나처럼, 도무지 쉬지 못하는 성격의 사람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야만 '진짜배기'를 캐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그래보려고 한다. 서울에서 '가치 있는' 일들을 하느라 잃어버렸던 나의 소중한 시간들을 되찾으려고 한다. 일주일에 백 시간쯤 자는 잠과, 언제나 저평가했던 육체 노동. 성가신 일로 치부됐던 정리정돈 같이 작은 일들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겠다. 돈이 해결해주던 식사 준비에도 정성을 들이고, 앞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어 안보던 TV도, IPTV로 백년전 드라마까지 다 찾아서 볼 거다. 이런 잉여로운 시간들이 결코 '낭비'가 아님을, 일 년 후 혹은 이 년이 될지 모르지만, 그 후에 스스로 입증하겠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다섯 수레의 책을 읽는 일이지만.

  21일에 본가에 내려가면 1월 2일에 또 옆 동네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다. 우스운 일은, 2주 사이에 나의 '부동산 계급'이 몇 계단이나 껑충한다는 점이다.
  표는 손낙구 씨 블로그에서 퍼왔다. '지하, 옥탑, 비닐집 등에 거주'하는 극빈층 6계급으로부터 '내집 있으나 셋방살이'라는 3계급으로, 그리고는 '7.5억 이하'의 자가 주택에 사는 2계급자로. 우스운 일이다.

  아무튼, 시험공부를 해야 하지만 워낙 나중 일을 앞서 생각하는 성격인지라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짐을 어떻게 쌀 지 구상이나 하고 있다. 정든 공간을 떠나는 게 아쉽기도 하고, 기다릴 것 없이 당장에 짐 싸고 싶기도 하고. 이사란 참 성가시고 피곤하지만 두근거리는 일임에 틀림없다. 2010이라는 비현실적인 숫자가 벌써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산뜻하게 출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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