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도 됩니다. 자기탐구일지 2009

2009. 5. 23. ~ 울어도 되는 날들입니다.

 

'행복했습니다. 노무현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비운을 겪은 대통령이었지만 그럼에도 가장 행복했을거다, 노무현은.

 

덕수궁 앞에 다녀왔다.

추모행렬에 합류한지 세시간만에 분향할 수 있었다.

어차피 국민장 치르니까 일주일 내내 추모할 수 있을테니까 반드시 오늘을 고집한 건 아니지만 귀가길에 들렀던 거였다. 세시간이나 걸릴 줄 알았다면 그냥 집에 왔을지도. 하지만, 다리는 온통 부었지만, 오늘 다녀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별 생각 없이, 작년 이맘때쯤 자주 그랬듯이 혼자 시청역을 찾았다. 대다수 집회의 전면 불허와 원천봉쇄가 상습적인 최근 일련의 상황 이전에 늘 그랬듯 현장은 매우 질서정연했다. 다들 엄숙했다.

바로 내 뒤에는 이삼십대 정도의 남자분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정치에 대해 보는 눈이 상당히 정확해서 흥미롭게 얘길 들었다. (나도 모르게 연신 고개가 끄덕여질 지경이었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좀 덜 지루할 수 있었다.

봉하마을에 도착한 이회창은, 날아드는 달걀 때문에 분향은커녕 차에서 내리지도 못했다 한다. 이명박이 가면 어떻게 될까. 이명박은 그냥 상갓집이고 뭐고 간에 불법집회 우려를 운운하며 싹 진압해버린 후 천연덕스럽게 애도가 어쩌구 하겠지. 그림이 그려진다.

끔찍하다. 남은 사 년. (청와대에서 또 어쩌구저쩌구 조문객 통제 개소리를 지껄였다는 소식에 분노해버린 상태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촛불의 현장이.

용산참사 때, 신용산역을 잠시 기웃거렸던 것 외에
송구영신 촛불 이후로는 한번도 촛불을 켜지 않았었다.

얼마전 신문광고에 난 책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대 왜 촛불을 끄셨나요'

정치가에게 중요한건 도덕성이 아니라 현명한 국정운영이고 민생 살리기라 믿으며 지지했던 이명박. 그의 실체에 각성하고 켜게 된게 내 촛불의 시작이었다.

청춘과 삶을 바치고자 했던 정치, 어리석고 순진하게도 뒤늦게 그 실체를 알고 깨나 실망하며 잠시 내렸다.

아무짝에도 효용이 없어 차라리 민망한 내 가슴속 촛불 이딴거 말고 물리적으로 촛불을 들어본 게 거의 반년이 됐다.

그대 왜 촛불을 끄셨나요. 나는 왜 촛불을 내렸던가.

 

형광핑크색 가방과 반바지, 빨간 조리가 머쓱했다. 블로그도 없는 주제에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며 기웃기웃. (당장 결심했다. 블로그를 만들기로.→ 그래서 지금 이렇게 블로그를 만들었다!) 모든 게 그대로다. 내 출신은 길바닥. 이 시청과 광화문과 또 명동과 종로 길거리가 나를 키웠다. 모태처럼 편안하다.

다시 비장하고 거친 운동권이 되지는 않겠지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대로 촛불을 가슴에 묻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 NGO는 날 거부했고 정당은 내게 맞지 않는다. 언소주 정도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조만간 연락을 해볼까 한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성격에 대해서, 취향에 대해서 고민이 많은 스무살이다.


자원봉사하시는 분들께, 너무나 너무나 고마웠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나도 해야 하는 일인데. 고작 세시간 서서 기다리는 것도 다리가 아파 그렇게 한숨을 쉬고 주저앉았다 서기를 반복했는데, 이분들은, 식사는 하셨을까. 잠이나 제대로 주무셨을까.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꼬박꼬박 상주인 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시던 분들. 사실 우리 국민 모두가 상주이고 또 조문객인건데, 누가 누구에게 고마워할 게 아닌데. 내가 오히려 더 감사한데, 머쓱함에 그런 말 못하고, 어둡게 그림자진 영정 사진에 울컥해 눈물에 콧물에 줄창 흘리고 있으려니, 한분은 내 어깨까지 토닥여 주셨다. 울먹울먹.

 

엄마아빠는 대전에 있는 민주당사에 가서 분향을 하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래, 이런 날은 울어도 된다. 부끄럴 것 없이 꺼이꺼이 울었다. 날 봐서 그랬을까, 옆에서 경향신문 읽고 있던 여자분도 우시더라. 꺼이꺼이. 지하철에 마주보고 앉아 뻘쭘하게 서로 눈물 훔치느라 혼났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절대 망하지는 않을거다.

서민대통령, 바보노무현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시민들이 있는 한. 서민들이 있는 한.

3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지경으로 길고 긴 추모 행렬이 있고 자기 일도 팽개치고 나와 자원봉사 하시는 고마운 분들이 있는 한. (한 분께 물어봤더니 노사모는 아니라 하셨다. 그냥, 그저 나와 같은 거리의 촛불들. 하긴, 노사모 분들은 다 봉하마을 내려가셨겠지.)

촛불이 변질이고 어쩌고 개소리들을 하지만, 이 숙연한 촛불들을 볼 때 아직 희망은 많이 있다.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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